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키예프 루스 (문단 편집) == 문화 == [[파일:external/kiev-assist.com/ancient-Kiev-by-Kiev-Assist-400x240.jpg]] 목조로 지은 교회 건축물들이 그 아름다움과 특유의 건축 형태로 유명했으나, 수명이 짧은 목조 건물 특성상 키예프 공국의 건축물 중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건물은 없다. 다만 역사 기록과 그림을 바탕으로 키예프 공국 시대의 아름다운 목조 건축물들을 복원한 야외 박물관이 [[우크라이나]] [[키이우]]와 [[르비우]] 등에 있으며, 이 외에도 [[러시아]]의 [[황금의 고리]] 지역에 [[루스]]의 옛 흔적이 꽤 남아 있다. > 류리크 왕조의 대부분 신민들은 슬라브인들이었다. 더욱 중요한 것은 슬라브 정체성이 키예프 지역 너머로 퍼져나간 것은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기독교 그 중에서도 정교회를 수용하고, [[교회 슬라브어]]를 예배, 설교, 지적 대화의 언어로 삼은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. 기독교는 키예프 영역의 슬라브 지역과 비슬라브 지역 모두에서 슬라브어와 슬라브 문화라는 치장을 하고 나타났다. '''루스가 점점 더 기독교화될수록 루스는 더 슬라브화되었다.''' >---- > 유럽의 문 우크라이나 / 세르히 플로히 저 / 허승철 역 [[사가]] 문학이 발전했으며, 《이고르 대공의 원정기》 같은 수준 높은 고전 서사시 작품도 쓰였다. [[정교회]] [[수도자]]들이 집필한 《원초 [[연대기]]》는 [[류리크 왕조]]의 기원부터 1110년까지를 다루었는데, [[슬라브족]]의 초기 역사, 분파, 습속에 관한 여러 가지 구전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. 1146년부터 1154년 사이에 일어난 공후 이쟈슬라프 2세의 키예프 대공위 계승 투쟁을 비롯한 이야기를 담은 《키예프 연대기》도 있다. [[우크라이나]]와 [[러시아]], [[벨라루스]]의 문학사에서는 키예프 공국 시대의 문학 작품을 동슬라브족 문학의 시초 중 하나로 평가하고 있을 정도다. 키예프 루스가 멸망한 후에도 13세기 후반 갈리치아-볼히니아에서 키예프 공국 시절 연대기에 영감을 받아 《볼히니아 연대기》를 편찬하였다. 《[[열왕기]]》와 《[[이사야서]]》의 영향을 받은 《볼히니아 연대기》는 교회와 관련된 일보다 세속적이고 군사적인 일들에 관해 더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. 흑해 및 카스피해와 스칸디나비아를 연결하는 무역을 통해 [[동로마 제국|동로마]] 문화 및 중동의 선진 문화를 적극 흡수하면서 높은 문화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. [[동로마 제국]]으로부터 이식받은 [[정교회|동방 정교회]]와 [[이콘]]의 전통 또한 동슬라브족 문화를 특징 짓는 키예프 공국의 유산이다. 다만 정교회 신앙이 일반 주민들에게 받아들여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. 키예프 공국 내에서는 정교회와 다른 종교의 차이를 제대로 설명해 줄 교육받은 성직자의 수가 부족했기도 하였고, 문화적 저항 때문에 키예프 루스 주민 대다수는 [[정교회]]와 [[슬라브 신화|슬라브 토속 신앙]]을 둘 다 믿는 '''이중신앙'''을 따랐다.[* 물론 당연히 천여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며 다른 유럽 국가들처럼 토속신앙은 종교가 아닌 고전 민속이 되어버렸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